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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보다 맛있는 외교 이야기

메콩강의 쌀 전쟁: 아시아 외교의 주방에서 벌어진 갈등

by yellowsteps4u 2025. 8. 20.

여름방학이면 가족 단위로 떠나는 해외 여행지 중 단연 눈에 띄는 곳, 바로 베트남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관광지 1순위로 손꼽히는 이유는 단지 저렴한 물가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품은 일상과 마주하게 된다. 나 역시 며칠간의 여행 중 메콩강 델타 투어에 참여하며 새로운 감각을 맛보게 되었다. Vinh Trang 사원의 고요한 정원과 거대한 불상, 자몽 농장에서의 점심식사, 전통 나무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흐르던 순간, 그리고 코코넛 캔디를 만드는 모습까지.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건 이 땅의 식탁 위에서 마주한 ‘쌀’이었다.

메콩강 델타, 그 풍요의 기원

메콩강은 티베트 고원에서 시작해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까지 이어지는 동남아 최대의 생명줄이다. 특히 메콩 델타 지역은 베트남 쌀 생산의 50% 이상, 수출량의 90%를 담당할 만큼 '쌀의 고향'이라 불린다. 이곳의 비옥한 토양과 연중 따뜻한 기후는 여러 작물 중에서도 벼농사에 최적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풍요는 자연이 준 축복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수로 개발, 관개시설 확장, 외교적 농업 협약 등 정치적 결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쌀을 둘러싼 외교: 생산과 수출의 간극

쌀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전략적 식량이다. 세계에서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중국과 인도이지만, 이들은 대부분 자국 내 소비에 머무른다. 반면 베트남과 태국은 상대적으로 생산량은 적지만, 글로벌 쌀 수출량 1~2위를 다투는 국가들이다. 이 차이는 ‘쌀을 외교 카드로 삼는 전략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래프 1.

Production of rice
세계 주요 쌀 생산국 (1994~2023년 평균 생산량 기준)

 

출처:FAOSTAT

 

이 그래프는 지난 30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쌀을 생산해온 10개국의 평균 생산량을 보여준다. 중국과 인도는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거대 생산국이며,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베트남·태국 등이 뒤를 잇는다. 이 가운데 주목할 점은, ‘생산량이 곧 수출량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중국은 세계 최대의 쌀 생산국이지만, 대부분 자국 내 소비로 흡수된다. 반면, 베트남과 태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세계 수출 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 차이는 쌀을 ‘전략 식량’으로 인식하는 국가들의 식량 안보와 외교 전략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생산이 많은 나라가 반드시 외교적 영향력이 큰 것은 아니다. 예컨대, 베트남은 2023년에도 쌀 수출량 기준 세계 3위에 올랐으며, 국제시장에서 인도와 태국의 수출 제한 정책이 이어지면서 점차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국가 간 쌀 외교는 단순한 식량 거래를 넘어 수자원 갈등, 기후 위기, 공급망 안정 등과 연결된 복합적 외교 행위가 되고 있다.

식량 무기화와 국가 간 갈등

최근 몇 년 간 쌀은 ‘무기화’되기 시작했다. 인도는 2022년 극심한 폭염으로 국내 생산량이 줄자 수출을 제한했고, 태국과 베트남도 수출 가격을 조율하며 국제 시장을 장악하려 했다. 이 흐름은 개발도상국,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메콩강 상류에 위치한 중국과 라오스, 태국 등이 건설한 대형 댐들은 하류인 베트남 델타에 극심한 물 부족을 초래했다. 이는 쌀 생산성 저하로 이어졌고, 국가 간 수자원 외교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베트남 내 메콩강 삼각주 지역의 위치

지도 1.

출처:
Wikimedia Commons
, 제작자: TUBS, 라이선스:
CC BY-SA 3.0

메콩강의 미래와 우리가 마주한 질문

나는 진심으로 베트남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매콤한 분짜와 향이 강한 고수를 곁들인 쌀국수, 그리고 단출하지만 깊은 맛의 볶음밥까지, 한국에서 베트남 음식점을 발견하면 꼭 들러보는 편이다. 그런데 메콩강 삼각주 크루즈에 올라 그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흘러가던 어느 오후, 나를 사로잡은 건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쌀'이라는 존재였다. 바구니에 담긴 자몽과 바나나, 손으로 만든 코코넛 캔디 사이로 밥알처럼 반짝이는 햇살이 스며들던 그 순간—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지역을 흐르는 물과 사람, 흙, 그리고 수많은 외교 문서들이 얽혀 만들어진 이 쌀 한 톨은, 그냥 식재료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수십 년간 이어진 국경 간 협상과 댐 건설, 농민들의 노동과 수출 정책들. 그렇게 오랜 시간과 이해관계를 관통한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돌아와서 집에서 쌀을 씻으며 다시 한 번 그 풍경이 떠올랐다. 우리가 무심히 퍼 담는 밥 한 공기가, 그저 배를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협상의 무기이자 생존의 열쇠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됐다. 그리고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 세계를 조금 더 정직하게 바라보게 된 것 같았다.

메콩강의 쌀 전쟁
베트남 쌀국수에 고숙가 잔뜩 올라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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