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마다 꼭 먹는 음식이 있다. 다들 냉면을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단연 콩국수다.
곱게 간 콩물에 탱탱한 소면. 그 위에 오리채와 삶은 달걀 반쪽까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더운 날씨에도 외출이 즐거운 이유, 어쩌면 이 한 그릇 때문일지 모른다.
어릴 적엔 동네를 돌던 두부 아저씨가 있었다. 리어카에서 들리는 종소리가 반가웠고, 엄마가 주신 동전을 손에 쥐고 뛰어나가 따뜻한 두부 한 모를 사 오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마트 냉장 코너에 깔끔히 포장된 두부를 본다. 익숙해졌지만, 뭔가 아쉽기도 하다.
두부 겉면에 쓰인 ‘원산지’를 유심히 보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국산일까? 수입 콩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매일 먹는 두부 한 모. 그 콩은 어디서 왔을까?
콩, 단백질 이상의 의미
어릴 적 두부를 먹는 건 그저 식사의 한 장면이었다.
엄마가 국에 넣던 순두부, 김치랑 구워 먹던 부침 두부는 너무 익숙했다. 그래서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식재료에 관심이 생긴 어느 순간, 나는 '콩'이라는 재료를 새롭게 보게 됐다.
두부, 된장, 두유, 청국장, 콩나물, 콩국수까지. 하루에도 여러 번, 다양한 형태로 이 콩을 섭취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콩은 단순한 단백질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식문화 그 자체였다.
흥미로운 건, 콩이 전 세계적으로도 핵심 식량 자원이라는 사실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대두(soya bean)는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3대 작물로 꼽힌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가공성이 좋아 인류의 영양 문제 해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특히 채식주의나 플렉시테리언 식단이 늘어가는 지금, 콩은 동물성 단백질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산업적으로도 콩은 식용유, 사료, 바이오 연료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이로 인해 글로벌 시장에선 전략적 농산물로 간주된다.
더 흥미로운 건 콩의 문명사적 가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콩을 재배한 기록이 있고,
중국 고대 문헌 『이아(爾雅)』에서는 콩을 오곡 중 하나로 꼽는다.
일본에서는 쇼진요리의 핵심 재료로, 불교의 금육 사상 속에서도 영양을 보충하는 식재료가 되었다.
서양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 식문화와 함께 콩 기반 식품이 확산됐다.
종교, 문화, 식생활, 그리고 국가 간 농업 전략에 이르기까지 콩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일까. 내가 여름마다 찾아가는 콩국수 맛집의 곱고 진한 콩물을 마주할 때면, 그건 단순한 여름철 보양 음식이 아니다.
그건 수천 년 이어진 인류의 식탁 선택을 마주하는 감각이다.
단백질을 넘어서, 콩은 문명 그 자체였다.
[1] 출처: FAO, Legumes: A key player in future food systems
세계 콩 수급의 힘의 균형
마트에서 두부 포장을 살펴보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콩의 원산지다.
국산일 수도 있지만, 미국, 캐나다, 브라질, 중국산인 경우도 많다.
이걸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건 이유가 있다.
콩은 이제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국제 농산물 외교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콩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브라질이 무섭게 추격하며 세계 시장의 1위 자리를 넘보고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콩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지만, 국내 생산량은 매우 적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 당시, 가장 타격을 받은 품목 중 하나가 바로 대두였다.
중국이 미국산 콩 수입을 대거 중단하면서 남미 국가들의 역할이 커졌고, 브라질은 최대 수혜국으로 떠올랐다.
지금 식탁에 올라온 두부는, 미국의 중서부 평야, 브라질의 대형 농장, 혹은 중국의 가공 공장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콩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까지 연결된 외교와 무역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한국 식탁과 외교의 접점
요즘 나는 두부나 콩국수를 살 때 무의식중에 ‘콩의 원산지’를 먼저 확인하게 된다.
그런 습관은 단순한 건강 걱정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새 한국의 식탁이 세계 농업 외교와 직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전체 콩 소비량 중 약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산 콩은 주로 장류와 두부 등에 일부 쓰일 뿐이다.
그마저도 수입산보다 가격이 높아 가정이나 식당에서는 외면받기 쉽다.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박동규 교수는 식량 주권이 없는 상황에서 외교 문제나 공급망 충격이 발생하면 소비자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고 지적한다[1].
특히 콩은 GMO(유전자변형식품) 문제가 늘 따라붙는다.
국내에 수입되는 콩의 상당수는 미국과 브라질 등지에서 생산된 GMO 품종이며, 이는 식품 안전성 논란과 함께 국민들의 선택을 복잡하게 만든다.
식약처와 농림축산식품부는 원산지와 GMO 표시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가진 소비자들이 많다.
게다가 최근 기후 변화 역시 콩 생산의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엘니뇨와 같은 이상기후가 발생한 해에는 세계 콩 생산량에 명확한 영향이 관찰된다.
그래프 1.
출처: FAOSTAT – Crops Primary Production Data
이 그래프는 2016년부터 2022년까지의 글로벌 콩 생산량(단위: 백만 톤)을 연도별로 나타낸 것이다. 특히 빨간 점으로 표시된 2016년과 2019년은 강력한 엘니뇨 현상이 발생한 해로, 이 시기에는 전 세계적인 기후 이상이 보고되었다.
주요 생산국인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은 엘니뇨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수확량에 직격탄을 맞는 경우가 많다. 2016년과 2019년에도 전체 생산량이 일시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서, 글로벌 식량 가격, 수출입 협상, 국내 물가에도 파급 효과를 미치는 중요한 변수다.
즉, 이 그래프는 우리가 마트에서 만나는 두부 한 모가 결코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기후 변화가 식탁 위의 선택지까지 흔들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걸 보여주는 지표다.
[1] 박동규 교수, 『농정시평 - 식량 자급률과 외교 리스크』, 한국농정신문, 2023.08.12.
두부에 담긴 기억과 갈등
어릴 적엔 종소리를 들으면 달려 나갔다.
동네를 돌던 두부 아저씨는 리어카에 방금 만든 따뜻한 두부를 싣고 다녔다.
엄마가 쥐여준 동전을 손에 꼭 쥐고 한 모 사 오던 그 일이 왠지 설레었다. 딸랑딸랑
손바닥에 전해지던 그 따뜻한 감촉,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흰 두부. 그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지만 요즘 마트에서 만나는 두부는 차갑다.
진열대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두부는 어린 시절 내가 먹던 따뜻함이 사라진 채고, 사실 요즘에 더 중요한 가치가 라벨로 붙어잇다
그리고 나는 습관처럼 라벨을 확인한다. ‘국산 대두 100%’ 혹은 ‘수입산 혼합’이라는 말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예전에는 이런 걸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쩔 수 없이, 라벨을 보고 그것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런 변화는 개인의 취향이상의 것이다. 누군지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거다
글로벌 공급망, 농업 정책, 무역 협정까지. 우리가 마주한 두부 한 모는 수많은 조건을 지나 우리에게 온 결과물이다.
그래서 요즘은 종종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두부가 어떤 땅에서 자란 콩이었을까. 누가 그걸 만들었고, 어떤 길을 거쳐 여기에 왔을까.
작은 음식 안에도 수많은 선택과 갈등이 담겨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오늘도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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