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비'가 국제 문제라고?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밭을 일구신다. 집 앞 개울을 따라 작은 밭이 있고, 봄만 되면 거름이며 퇴비며 바쁘게 챙기신다. 흙을 기름지게 만드는 게 농사의 반이라는 걸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가끔은 정부에서 퇴비를 지원해 준다고도 하는데, 냄새난다고 코를 막으며 장난치는 아버지 친구들을 보며 “이게 농사의 기본”이라며 웃으신다.
나도 예전엔 퇴비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 싶었다. 그런데 2022년,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비료 수출을 멈추자 세계 곡물 시장이 출렁였다. 생각보다 조용히, 하지만 무섭게 시작된 위기였다. 뉴스에서는 '비료가 무기화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러시아는 세계 비료 수출의 15%를 차지하고, 벨라루스는 칼륨 비료의 주요 수출국이다. 전쟁과 제재로 이 물꼬가 막히자, 농민들은 씨앗보다 거름 걱정부터 해야 했다. 농업 생산량이 줄어들고, 결국은 식량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퇴비는 작고 냄새나는 덩어리일지 몰라도, 그 안에는 식량과 외교, 그리고 우리의 식탁이 얽혀 있다. '비료의 역습'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시작을 오늘, 함께 따라가 보자.
글에서 다룰 내용
농업 생산과 식량 가격에 미친 영향
러시아·벨라루스에 대한 경제 제재가 본격화된 2022년, 국제 비료 가격은 급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료 중에서도 특히 질소·칼륨·인산 비료는 작물의 생장과 수확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재입니다. 이 세 가지 비료 가격이 어떻게 변동했는지 아래 그래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2년 이후 비료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칼륨 비료는 2020년 대비 2.6배 이상 오르며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질소 비료 역시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축소와 맞물려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이처럼 비료 가격 상승은 단순히 농업 원가의 증가를 넘어, 세계 식량 공급 체계 전반에 충격을 준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세계은행과 FAO(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2022년 말~2023년 초 기준으로 국제 곡물가가 최대 30%까지 상승한 국가도 존재합니다. 특히 비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저개발국일수록 피해가 극심했고, 일부 국가는 곡물 수확량이 전년 대비 15~25% 줄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비료는 단순한 농자재가 아닌 ‘지정학적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로이터 통신은 이를 가리켜 “보이지 않는 전쟁의 화약고”라며 국제 농업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누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가?
러시아·벨라루스의 비료 수출 제재는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쳤지만, 피해의 크기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농업 기반 개발도상국은 비료의 8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국제 비료가격이 2배 이상 오르자, 이들 국가의 소농(小農)과 가족농 중심의 농민들은 농지 절반에 비료를 주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농업 생산량은 줄고, 곡물 수확량은 15~30%까지 급감한 지역도 있습니다. 식량자급률이 낮은 국가는 식량 수입 부담까지 겹치며 사실상 삼중고(비료·곡물·운송)를 겪게 된 것입니다.
세계은행은 2023년 보고서에서, “비료 수출 제재는 가장 가난한 국가의 농업 시스템을 먼저 무너뜨린다”며, “식량 위기보다 먼저 찾아오는 비료 위기가 향후 10년간 반복적으로 국제 시장을 흔들 수 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비료 가격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농업 공급망에서 약한 고리가 먼저 끊어진 사례이기도 합니다. 특히 지정학적 긴장과 식량 무기화의 흐름이 계속된다면, 가난한 나라일수록 더 큰 피해를 보게 되는 구조적 위기가 지속될 것입니다.
벨라루스는 왜 비료 수출의 핵심인가?
벨라루스는 동유럽 내륙에 위치한 국가로, 러시아와 매우 밀접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독재 체제 하의 루카셴코 대통령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적극 지지하며, 자국 영토를 러시아의 병참로로 제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EU와 미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 대상이 되었으며, 주요 수출품목인 칼륨 비료(Potash)의 해외 판매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벨라루스는 전 세계 칼륨 비료 생산량의 약 20%를 담당하고 있으며, 수출 비중도 18%에 달합니다. 그러나 2022년 리투아니아가 벨라루스산 칼륨 비료가 통과하던 주요 철도 노선을 차단하면서, 유럽을 통한 해상 수출길이 사실상 끊겼습니다. 이는 세계 칼륨 비료 가격 급등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 출처: FAO(2022), ITC TradeMap(2022), World Bank 데이터 기반 재가공
특히 칼륨 비료는 뿌리 작물(감자, 사탕무 등)에 필수적이며, 전 세계 농업 생산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벨라루스의 제재가 단지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세계 식량 안보의 숨은 변수였던 셈입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비료의 상당량이 단 몇 개 국가에 의해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세계 비료 수출의 ‘핵심 축’으로, 두 나라만 해도 전체 수출량의 25% 이상을 차지합니다.
아래 표는 주요 비료 수출국 5개국의 수출 비중과 주요 품목, 그리고 국제 제재에 따른 영향도를 요약한 자료입니다. 글에서 언급한 내용은 FAO, World Bank, ITC Trade Map 등의 공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러시아-벨라루스의 비료 수출 제재는 개발도상국의 농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도미노가 되었다. 이 충격은 식량 위기보다 먼저 왔고, 더 깊다.”
— 세계은행, 2023년 식량·비료 위기 보고서 중
🔹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세계 비료 수출의 25% 이상을 차지
🔹 칼륨, 질소 비료 공급 차질 → 가격 폭등과 농업 생산량 감소
🔹 특히 벨라루스는 칼륨 수출 의존도가 높아 제재 영향이 치명적
🔹 공급망 불안정은 개발도상국 농업 시스템에 직접적 타격
1편 정리
비료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무기입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수출을 줄이거나 막았을 때, 세계 곳곳에서 그 충격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농업 생산량이 줄었고, 곡물 가격이 올랐고, 결국 식탁의 밥값이 올라갔습니다.
국제 제재가 의도한 정치적 효과는 미지수지만, 그 파편을 고스란히 맞은 건 농민과 저소득 국가들이었습니다. 비료는 단순한 농자재가 아니라, 오늘날엔 식량 안보와 외교전략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나 역시 아버지의 밭일을 지켜보며 비료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흙냄새나는 퇴비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연결된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세계 곡물 공급의 보이지 않는 키를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얼 먹고 사는지’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한국의 비료 수입 구조와 자급률, 그리고 이런 글로벌 비료 위기 속에서 우리가 어떤 전략으로 식량 안보를 지켜나가야 할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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